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당 전쟁 (문단 편집) == 전쟁 사이의 전쟁, 650년대 각축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94osqp08q02244r9n30s01n2s889756n.jpg|width=100%]]}}} || || 요하 유역도 || 연개소문과 고구려에 대한 공포는 각인되어 대륙 깊숙한 곳까지 전승을 남겼으나 이것으로 고구려가 시대적 과제를 완수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당연합이 결성되었고 이세민이 죽기 직전까지 고안하고 준비한 소모전과 상륙작전의 효과는 입증되었다. 또한 당나라는 645년의 전쟁 이후 고구려 주변 종속국들에게도 손을 뻗쳤다. 이에 대해 연개소문이 낸 수는 요하 상류에 있었다. [[랴오허|요하]]는 일반적인 인식에 비해서 훨씬 더 서쪽으로, 그리고 북쪽으로 뻗친 강이다. 상류의 북쪽 지류인 시라무렌강은 몽골로 뻗는 드넓은 사막과 초원 경계에 근접해있으며 남쪽 지류인 노합하는 만리장성 코 앞을 흐르는 강이다.[* 노합하가 흐르는 내몽고 적봉시, 하북성 승덕시에서 난하만 건너면 바로 북경이다. 하루만에 주파한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근접한 곳이다.] 거란과 해가 자리잡은 요하 상류를 고구려가 장악한 수세기 동안 중국 입장에서는 오늘날 북경 동부까지의 2천리 구간은 주현 취급도 못 받는 깡촌으로 남았다. 반대로 고구려에게 이곳은 자신들의 본토를 감싸는 방패이자, 북방과 서역으로 뻗어나가는 창구였다. 하지만 이곳이 온전히 고구려의 수중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고구려와 중원, 몽골초원 이렇게 동아시아 3강의 각축장이었고 이곳의 세력들은 시세에 따라 강한 곳에 붙었다. >고려가 장군 안고를 보내 고려병과 말갈병을 거느리고 거란을 침공하였다. 송막도독 이굴가가 기병을 동원해 그들을 막았는데, '''[[츠펑시|신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 >'''책부원구''' 외신부 고구려는 내몽골 시라무렌강 인근에 위치한 [[츠펑시|송막 신성]]을 쳤다. 이 전투에서 거란의 친당파 수령 이굴가[* [[이진충]]의 조부이다. 이세민이 고구려에 패배한 직후 이세민을 지지, 그의 환심을 사서 송막도독에 책봉된다]는 화공으로 고구려의 기병 500명을 죽이고 그 시체를 모아 [[경관]]을 쌓았다. 당 고종은 승전보를 조정에 펼쳐 보여 이를 기념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이굴가는 인상적인 무공을 기록하였으나 전체적인 싸움과 거란 신성의 향방은 해석에 따라 엇갈린다. 이후 650년대 전쟁에서 등장하는 고구려군의 신성이 거란 신성으로 해석되는가 하면 거란이 이후 고구려를 압박하는데 별다른 역할을 못하고 오히려 고구려는 신라에도 동시에 힘을 쏟는 여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휘 6년에[* 서기 655년 1월] 신라가 '''고려와 말갈이 성 36개를 빼앗음'''을 호소하여 구원을 청하였다. 조서를 내려 영주도독 [[정명진]], 좌위중랑장 [[소정방]]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책부원구에 10,000명으로 기록] 치게 하였다. 신성에 이르러 고려 병사를 이기고 성 바깥과 촌락에 불을 놓고 돌아왔다. >---- >'''신당서 고려전''' >겨울 10월에 [[김춘추|왕]]이 조정에 앉아 있는데,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었으므로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6년 기사 >영휘 6년에 소사업에게 [[위구르]] 기병을 거느리고 고려를 치게 하였다. >---- >'''구당서 회흘전'''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대한 공세를 유지하는 동시에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에게도 칼을 겨누었다. 신라는 나당연합을 결성시킨 주역, [[김춘추]]가 막 즉위한 상황이었다. 655년, 고구려-백제-말갈 연합군은 대대적으로 신라를 침공하여 신라 북방의 30~36개의 성을 함락시켰고 659년에도 고구려-말갈 연합군이 하슬라(강릉) 방어선을 공격하면서 신라는 남쪽의 실직(삼척)을 2선 방어 기지로 삼아야 했다. 이는 신라에게 있어서 엄청난 국가적 위기였고 신라는 무열왕 즉위 이후 끊임없이 당에 구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당에서는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고구려 방면으로 정명진, [[소정방]], [[위구르]] 기병을 이끌던 소사업 등을 투입했다. 의례적인 태자 책봉 축하 사절 기록이 있는 656년에 잠깐 전쟁 기록이 잦아들 뿐 싸움은 계속되었다. >현경 2년(657년) 설인귀에게 명하여 정명진을 보좌하여 요동을 공략토록 하였는데 귀단수에서 고려를 깨트려 3,000명을 베어 죽였다. >다음해 양건방, 계필하력과 더불어 고려 대장 온사문에 맞서 횡산에서 싸웠다. >---- >'''구당서 설인귀 열전''' >현경 3년(서기 658년) 6월에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 정명진,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의 적봉진을 함락시켜 400여명을 참하고 포로 100명을 잡았다. 고려는 대장 두방루로 하여금 3만명으로 대항하였으나 정명진이 거란을 이끌고 거꾸로 들이쳐 크게 깨트렸는데 참수한 것이 2,500명이었다. >---- >현경 3년(혹은 4년) 11월에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 등으로 하여금 고려 장군 [[온사문]]과 횡산에서 싸워서 깨트렸다. >---- >자치통감 당기 >현경 3년에 정명진을 보내 설인귀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타국과의 전투에서 대패를 당했을때 많이 쓰이는 표현이다.] >---- >신당서 고려전 장군~중랑장 선에서 진행되던 싸움에는 대장군들이 등장하였다. 고구려에서는 두방루, 온사문 등이 등장하고 당나라에서도 [[계필하력]], 양건방 등 당나라 1세대 대장군들이 투입되었고 귀단수, 적봉진, 횡산 등지가 주요 격전지가 되었다. 고구려가 깨졌다는 당 실록 기록이 자치통감에 인용되었는데 고구려가 이겼다는 기록도 같이 남아있거나 아예 결과가 누락된 경우도 존재한다. 기록마다 연대가 달라서 순서가 섞이는 감이 있지만 순서에 따라서 누락된 고구려의 전쟁 양상들이 조금씩 달라진다. >현경 연간(650년대 후반), 가도자(可度者)가 죽자, 해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 >굴가가 죽고나서 해와 연결해 반란을 일으켰다. >---- >'''신당서 북적전 해, 거란''' >장군 신문릉과 함께 흑산에서 거란을 깨트려 거란왕 아복고와 수령들을 잡아 낙양으로 끌고갔다. 이 공으로 하동현남에 봉해졌다. >---- >'''구당서 설인귀 열전''' >위대가는 처음에는 좌천우비신이 되었다가 영휘 년간에(650년대 초) 강하왕 도종이 처벌받자 연좌되어 노룡부 과의로 좌천되었다. 장군 신문릉이 병사를 이끌고 고려를 쳤는데 '''토호진수에 이르렀을 때 고려가 이를 습격하여 패배하였다.''' >---- >'''구당서 위정전''' 노룡부는 북경과 산해관 사이에 위치한 지방 군사조직이며 토호진수는 오늘날의 노합하에 해당한다. 북경 코앞 노룡부 관할까지도 고구려의 거점이 밀고 들어왔다.[* 이 기록은 650년대 초로 해석되기도 한다.] 거란과 해에서도 일진일퇴는 계속되었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이 계속되는 중, 묘하게도 해족의 친당파 수령 가도자, 거란족의 친당파 수령 이굴가가 같은 시기에 죽고 동시에 거란과 해 모두 당에게 등을 돌린다. 당은 이들을 공격하여 해왕 필제를 죽였고 거란왕 아복고도 포로로 잡아간다. [[백제|660년 5월의 일이었다.]] [[파일:650년대 고당전쟁간략.png]] 650년대 내내 계속되었던 각축전의 승부는 어찌 되었는지 견해가 엇갈린다. 혹자는 거란왕 아복고, 해왕 필제 등 고구려에 우호적으로 작용하던 세력들이 당에 패배한 것, 적봉진과 같은 거점의 함락 등을 근거로 내몽골이나 요서에서 고구려의 세력이 축소되거나 철수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혹자는 이어지는 2차 고구려-당전쟁 때 거란과 철륵 등이 당나라보다는 고구려에 훨씬 우호적으로 작용한 점, 2차 고구려-당전쟁까지의 대승, 연씨 가문 휘하의 거란 등의 정황으로 보아 오히려 고구려가 이 일대의 주도권이 강화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어찌되었던 고구려와 당, 양대 강국은 북방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거란]] [[돌궐]] [[해]] [[말갈]] [[위구르]]에 이르기까지 북방 민족이 포함된 수많은 군사들이 동원되었다. 싸움은 이전의 1차 고구려-당전쟁과 부차적인 소모전의 연장선상이었고 그 다음 이어지는 2차적인 대전의 서막이었다. 당나라는 패배의 설움으로 15년 동안 절치부심하였고 그 대전략과 연계된 가공할 만한 일격이 아직 남아있었다. >고종이 즉위하고 병부상서 임아상, 우무위대장군 소정방,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 등에게 명하여 전후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모두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 >'''구당서 고려전''' 당은 이 전쟁을 2차 고구려-당전쟁과 묶어서 공이 없었다고 자평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